스스로 시간의 종말을 향해서 걸어갔던 사람들, 정말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무엇을 위하여 담대히 죽을 수 있었을까?
2016년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 150주년이자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는 해다.
150 여 년 전 조선에 온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중국 만주를 통해 도강을 하거나, 아프리카를 돌아 동남아를 거쳐 조선까지, 풍랑과 해적의 위험을 무릎 쓰고 조선에 들어 왔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20명의 선교사들 중 12명이 순교했다. 선교사를 파송한 모국인 프랑스 교구에서 조차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한 음악가의 열정과 감독의 세밀한 고찰로 무덤 속에 묻혀 있던 순교자들의 산 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김대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시간의 종말’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
영화를 총기획한 첼리스트 양성원은 2015년 명동성당 고찬근 주임 신부로부터 성당 건립에 사용된 벽돌이 순교한 프랑스 신부들이 묻힌 곳의 흙으로 구워졌다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이야기가 실마리가 되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한 신부들의 발자취가 한편의 다큐멘터리영화로 완성됐다.
이 영화가 가톨릭 홍보 영화가 되는 것을 경계하며 ‘종교’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마음’과 ‘눈’으로 순교자들을 바라보길 원했던 기획자의 의도대로 영화는 ‘종교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순교의 가치가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백미는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 음악과의 융합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메시앙은 1941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요한계시록에 영감을 받고 첼로와 바이올린 피아노 그리고 클라리넷을 위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작곡한다. 이 곡은 수용소에서 포로들과 초연됐다. 그러나 이곡의 진가가 영화 ‘시간의 종말’을 통하여 비로소 빛난다. 젊은 신부들의 결연한 마음과 닿아있는 듯, 순교자들이 겪은 핍박의 환경과 메시앙이 곡을 썼던 극한의 상황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로 연결된다. 특별히 영화에서는 양성원이 이끄는 ‘트리오 오원’과 채재일 서울시립교향악단 클라리넷 수석이 협연했다.
9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프랑스의 한 시골 소년 샤스탕의 마음을 매료시킨 조선. 그 조선에 ‘복음’을 전한 그의 아름다운 발걸음이 150년 후, 샤스탕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한 음악가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 감동은 영화와 음악으로 예술로 승화된다.
남녀가 유별하고 반상제도가 엄중한 그 시절에 ‘인종을 초월하고 남자나 여자나 양반이나 종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한마음으로 행복했던 그 사랑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벗들이여 태초에 만물을 마련하신 천주께서는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험하고 비참한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가장 높으신 주인과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태어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한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회유문은 그래서 바로 나에게 던지는 질타처럼 들린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사니?”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