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달(月)’이다.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10월에 몰렸으며, 그것이 1979년 10월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을 비롯해서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10.26 사건까지 숨쉴 틈 없이 달려온 시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다. 1979년 10월이 우리 현대사에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산업화의 시대에서 민주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뉴스투데이에서는 창간 10주년을 맞이해 1979년 10월 그날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한국뉴스투데이]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현재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면서 일어난 항쟁이다. 16일 당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를 외치면서 시위를 시작했고, 그 시위는 시민으로 확대됐으며, 이어 마산(현재 창원) 지역으로 확산됐다.
부마항쟁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은 부마 지역으로 내려갔었는데 연행된 사람들을 살펴보니 학생들은 극소수이고, 모두 일반 시민들이라는 사실이 충격을 받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해당 보고를 무시했다. 결국, 10·26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민주항쟁의 발단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여당인 공화당이 신민당에게 지지율 면에서 패배를 하게 되고, 다만 농촌 지역에서 의석을 더 얻으면서 간신히 집권여당의 체면을 차리게 된다. 그러자 유신 체제는 더욱더 민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가하던 중 YH무역주식회사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하는 ‘YH무역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끌어내리게 해야 한다고 밝히자 집권 공화당은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게 된다. 이에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를 하게 됐고, 이것에 반발해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를 하면서 경공업 기반인 부산과 경남이 큰 피해를 입었고, 2차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심각한 경기침체가 이어졌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는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내용의 ‘선언문’이 뿌려지게 된다. 상대생 정광민씨가 ‘선언문’을 작성하고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이 뿌려지게 된다. 정광민씨가 인솔하는 시위대는 점차 그 숫자가 불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5천여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학생들은 담벼락을 넘어 시내로 진출하게 되는데 남포동과 부산시청, 광복동에 집결하면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 부산대 학생들의 시위 소식은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로 퍼지게 되고, 이들 학생들도 합류하면서 시위 규모는 커지게 된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경찰은 당황하게 되고, 시민들 역시 학생들을 응원하기 시작하면서 빵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등을 시위대에 건넨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서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하면서 5~7만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에 가득 메우게 된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히 학생 시위가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를 하게 된 셈이다.
부산대 임시휴교 들어갔지만
17일 부산대는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부산대 교정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고, 결국 시내로 진출하게 된다. 전날과 비슷하게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만 명이 운집하게 됐고, 경찰은 최루탄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 전소, 12대 파손, 21개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됐고, 언론사와 경남도청도 공격받았다. 대규모 시위에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에 육군 특전사 2천여 명의 병력이 투입된다.
마산으로 확산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은 인근의 마산으로 번지게 된다. 이에 경남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이 18일 스크럼을 짜고, 3·15 의거탑에서 시위를 벌였고, 마산 시내로 진출을 하게 된다. 이날 저녁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은 마산 시내 중심가에 모여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된다.
당시 민주공화당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지만 학생들과 시위대의 운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마산 지역 수출 노동자까지 합세를 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20일 0시 마산과 창원 일대 위수령을 발동하게 된다.
공수부대 투입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하면서 부산과 마산지역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명사령관, 제7연대, 2연대 등이 투입된다.
이들은 매우 폭력적이면서 혹독하게 시위대를 진압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했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고 당시 진압부대원이 증언했다.
당시 가내수공업자였던 김 씨는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다. 그러자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세 차례 폭행한 후 군화발로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찼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해서 실신하게 됐다.
깨어나 보니 시민 7~8명이 원산폭격 당했고,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 때문에 휘청거리자 엄살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당했다. 이런 무자비한 진압은 마산 완월동에 살았던 건설노무자 유치준씨가 사망하는 사태로 번지게 된다.
당시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당시 소지품으로 들고 온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신원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과 가매장을 실시했다.
신문과 언론에서는 불량배가 시위했다고 연일 보도를 했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주장했다고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증언했다.
김재규 중정부장은 부마민주항쟁 지역을 직접 돌아다녀 본 후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대로 시위대 대다수가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고, 결국 10·26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김재규 부장이 부마항쟁 지역에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차지철 경호실장이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주장했던 발언들이 10·26 사태 이후 전해진 발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0·26 사태의 정당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발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