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대 60% 이상 “비건 존중”, 50% 이상 “비건 라이프 의향 있다”
레스토랑, 모피 사용 중단, 비건 레더로 만든 시트 등 산업 전반 영향
동물원에서 태어난 퓨마가 탈출해 추적 끝에 사살한 사건은 잊히지 않는 충격으로 남아있다. 화학품을 위해 동물 실험을 자행하고 캣맘과 원주민의 싸움은 폭력으로 번진다. 동물권을 위하는 일이 인권보다 더 중요하냐는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는 혐오의 세상이다. 하지만 이젠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단어 ‘동물권’. 인간과 같이 비인간 동물 역시 인권에 비견되는 생명을 지니며 고통을 피하고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이 단어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무거운 주제를 탐구한다. <편집자주> |
피터 싱어가 쏘아 올린 ‘동물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뉴요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 피터 싱어는 1973년 책 <동물해방>을 통해 처음으로 ‘동물권’에 대한 논제를 세상에 던졌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그는 “인간이 느끼는 정도의 쾌락과 고통을 동물도 느낀다면, 동물의 고통을 인간의 고통과 평등하게 고려해야(동물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이런 실천윤리와 동물해방 이론에 관해 다수의 저서를 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를 반대하는 ‘비거니즘((Veganism)’에 힘을 실었다. 실제로 그 역시 40년 넘게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0월 그가 펼쳐 낸 <왜 비건인가?>는 활발히 확장되는 비거니즘의 바이블로 손꼽힌다.
비거니즘이란 동물을 착취해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동물권을 옹호하며 종 차별에 반대하는 사상과 철학을 의미하는 큰 개념이다. 비거니즘을 지지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비건(vegan)’이라 부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물성 식품이나 제품 활용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완전한 비건이 되기는 어렵다. 때문에 많은 비건들이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생선과 육류, 우유와 알, 꿀 등 동물에게서 얻어지는 식품을 일절 거부하는 완벽한 비건부터 육류와 어패류나 동물의 알 등은 먹지 않고 우유 유제품 꿀을 먹는 락토(Lacto), 육류와 생선, 해물, 우유, 유제품은 거부하고 달걀만 먹는 오보(Ovo), 채식을 하면서 달걀이나 우유, 꿀처럼 동물에게서 나오는 음식을 먹는 락토 오보(Lacto-Ovo), 채식을 하면서 유제품이나 가금류의 알, 어류를 먹는 페스코(Pesco), 우유, 달걀, 생선, 닭고기까지 먹는 폴로(Pollo), 기본적으로 채식을 하지만 아주 가끔 육식을 겸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극단적 채식주의자로 채식 중에서도 과일과 견과류만 먹고 식물의 뿌리와 잎을 먹지 않는 플루테리언(Fruitarian) 등 비건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심상치 않은 비거니즘 확산
‘비건’이란 용어는 최초의 비건 운동가이자 영국 협회인 비건 소사이어티(The Vegan Society)를 설립한 도날드 왓슨(Donald Watson)이 처음 고안하여 사용했다. 영국 채식주의자 협회의 일원이었던 그는 유제품과 달걀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를 위해 협회 소식지 지면을 할애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도날드 왓슨은 1944년 비건 소사이어티를 설립하고 《비건 뉴스 The Vegan News》를 창간했다. 그에 따르면 비건은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vegetarian’의 첫 부분과 끝 부분 철자를 결합한 것으로, 채식주의자가 채식을 시작해 궁극적으로 비건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비거니즘이라는 용어는 1951년 비건 소사이어티가 정의했으며, 인간이 살아가면서 동물을 착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조를 뜻한다고 밝혔다.
국내에도 비거니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MZ세대를 중심으로 동물보호 및 환경보존에 관한 관심이 친환경 소비 트렌드로 표현되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한국채식비건협회에 따르면 세계 비건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1억 8,000명, 국내는 250만 명으로 점진적 증가 추세를 보인다. 이는 2018년 150만 명에서 2021년 250만 명으로 최근 3년간 6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동물의 고통을 통한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출발한 비건을 한국의 상황과 맞지 않다고 지적하는 외국인도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대게나 낙지, 문어 등을 냄비나 찜통에 바로 넣는 해물 요리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최근 문어가 인간의 뇌 발달과정과 유사한 발달과정을 보인다는 사실이 점진적으로 규정됨에 따라 일부 국가에선 문어를 산 채로 삶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포함한 동물복지법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스위스는 갑각류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끓는 물에 넣는 요리법을 세계 최초로 금지했다. 노르웨이,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호주 등에서도 이에 대한 법제화가 이어졌다. 영국 동물복지법 개정안에는 갑각류와 문어, 오징어 같은 두족류를 산 채로 삶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두족류를 먹으려면 조리 전에 전기 충격을 가해 기절시켜야 한다. 이 법안들의 공통점은 식량으로 다른 동물을 먹을 수는 있지만, 불필요한 고문이나 학대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산업계 전반에 퍼진 비거니즘 경향
이처럼 세계적 비거니즘 움직임이 국내 비거니즘 열풍에 큰 효과를 불러왔다. 최근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채식에 관한 인식을 묻는 조사 결과 약 60%에 이상의 응답자들이 채식을 개인의 취향으로 존중한다고 답했다. 그뿐만 아니라 10명 중에서 무려 3명이 채식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보였다고 전해지며 더욱 채식에 대한 수용력이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비거니즘 열풍은 MZ세대를 중심으로 불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30세대의 50% 이상이 비건 라이프를 살아볼 의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듯 산업계 전반에 비거니즘 경향은 외식·패션·화장품·자동차 등 산업 전반에 확장된다. 농심은 지난 5월 잠실 롯데월드에 비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포리스트 키친’을 오픈했고 신세계푸드는 지난 7월 강남구에 비건 레스토랑 ‘더 베러’를 오픈했다. 풀무원 역시 서울 강남구에 캐주얼 비건 레스토랑 ‘플랜튜드’를 운영 중이다.
글로벌 패션 기업 ‘케링(KERING)’은 구찌·생로랑·발렌시아 등 쟁쟁한 브랜드를 보유했다. 케링은 지난 가을부터 모피 사용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구찌는 이미 2년간 자체 연구를 통해 목재 펄프와 비스코스 등 식물성 원료 기반의 비건 레더를 개발했고, 올해 6월 비건 스니커즈 라인을 출시한 바 있다.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 국내 화장품 업체 역시 활발하다. 이들은 동물 조직·뼈 등에서 추출한 원료를 식물성으로 대체한 제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2020년 6월 비건 화장품 브랜드 이너프프로젝트(Enough Project) 브랜드를 론칭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미래의 테슬라 모델을 비건 자동차로 만들겠다”고 얘기하고 모델 3에서 파인애플 잎과 줄기를 사용한 비건 레더로 시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볼보는 역사상 처음으로 가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었고 벤틀리는 100주년 기념 모델의 시트 제작에 가죽이 와인 제조 공정에서 발생하는 포도 껍질과 줄기로 만든 비건 레더를 사용했다. 지난 2019년 상하이 모터쇼에서 폭스바겐은 사과 껍질에 폴리우레탄을 혼합해 만든 비건 레더로 시트를 제작해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강요가 아닌 인식 전환의 필요성
이처럼 국내 비거니즘이 확산함에 따라 비건 산업 전반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자연재해 등 기후변화에 관심이 더해져 비거니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론도 더욱 증가하고 있다. 이제 비거니즘은 단순한 채식 문화를 벗어나 동물호보, 환경보존 등 생활 습관의 변화를 포괄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개념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즉, 비거니즘은 최근 동물과 환경보호는 물론 윤리적인 소비의식까지 더해진 삶의 또 다른 태도로 자리하고 있다.
비건은 육식이 동물에게 불필요하고 잔인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소비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꼭 모두에게 동물 애호가가 되고 육식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삼겹살 집에 무단으로 난입해 육식을 비난하는 게릴라성 시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 찌푸리게 하기 충분하다. 비거니즘이 심은 라이프 스타일의 핵심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수많은 동물이 겪는 고통에도 똑같이 공감하고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단순한 이치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애완동물, 반려동물, 관상용 동물, 식용동물 등 인간이 자의적 용도에 따라 동물을 분류하고 선택적으로 편애하는는 ‘종(種) 차별주의’를 멀리하자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