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기획】 보수화된 교육과정...성평등·성소수자·재생산 삭제

국교위, 큰 수정 없이 의결...이달 내 장관 승인할 듯 ‘자유민주주의’ 추가하고 ‘노동자’ 대신 ‘근로자’ 사용 성평등·성소수자·재생산·전성적 존재·섹슈얼리티 삭제

2022-12-21     정한별 기자

【연말기획】 퇴보하는 교육과정, 강행하는 정부

①보수화된 교육과정...성평등·성소수자·재생산 삭제
②의견 공개·반영 않는 교육부...불투명·불통 논란
③교육과정 확정...교육계 “역사적 퇴행” 반발 여전

7년 만에 전면 개정되는 새 교육과정의 개정안이 확정됐다. 이번 개정안에는 기존 교과서의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병기됐고, ‘성소수자’와 ‘성평등’은 삭제됐으며, ‘노동자’는 ‘근로자’로 수정돼, 전반적으로 보수화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개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교육부가 정책 연구진의 의견과 다른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고, 교육과정심의회도 단 한 차례만 진행하는 등 졸속으로 절차를 밀어붙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특히 행정예고 과정에서 교육과정심의회의 수정 요청에도 교육부 측이 표결을 거부했다며 전교조와 실교모 등은 장상윤 교육부 차관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한 상태다. 제주 4·3을 기술할 근거가 돼 온 ‘학습요소’ 부분 역시 삭제돼 제주 4·3 명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다. 전면 재검토 및 폐기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이번 교육 과정 개정 절차에서 드러난 문제점과 쏟아지는 우려들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국가교육위원회가

[한국뉴스투데이] 국가교육위원회(이하 국교위)가 기존 교육부의 교육과정 심의본을 큰 수정 없이 의결하면서 2022 개정 교육과정은 기존 발표 내용대로 사실상 확정됐다. 앞서 교육부는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추가하고 ‘노동자’ 표현을 삭제하는 등 보수화된 개정안을 발표해 논란이 일어 온 바 있다. 특히 ‘성평등’, ‘성소수자’, ‘재생산’, ‘섹슈얼리티’, ‘전성적 존재’ 등 성이 포함된 단어들은 보수 단체의 거센 반발 요구에 따라 모두 삭제됐다. 

국교위, 수정 없이 개정안 의결

지난 14일 대통령 소속 국교위가 제6차 회의 끝에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심의본을 수정·의결했다고 밝히면서,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사실상 확정됐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19명 위원 가운데 표결에는 16명이 참여했고, 찬성 12명, 반대 3명, 기권 1명으로 과반수 찬성을 얻었다. 야당 몫의 추천 위원 3명은 의결을 강행하는 국교위의 심의 방식에 항의하며 퇴장해 표결에 불참했다. 

국교위는 기존 교육부 심의본 원안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되 ▲보건 과목의 ‘섹슈얼리티’ 용어 삭제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취기준 또는 성취기준해설 등에서 의미를 명확히 제시 ▲제주 4·3은 향후 역사 교과서 편찬 시 반영 등 수정하기로 했다. 

국교위는 지난 9월 27일 출범한 대통령 직속 행정기구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중장기 교육정책을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마련됐다. 교육 비전, 중장기 교육 정책의 방향, 교육 제도 및 여건 개선 정책 등을 결정한다. 국가교육과정에 관한 결정과 고시 역시 국교위의 소관이지만,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이미 지난해 4월부터 개발돼 온 만큼 예외적으로 교육부가 주도해 심의본을 만들기로 했다. 현재 국교위가 심의·의결을 마쳤으므로 이달 31일까지 교육부 장관의 고시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교육과정은 지난 2015년 이후 7년 만의 개정으로, 오는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을 시작으로 2025년 초등학교 3·4학년과 중·고등학교 1학년에, 2026년부터 초등학교 5·6학년과 중·고등학교 2학년에, 2027년부터 중·고등학교 3학년에 순차적으로 적용된다. 

국교위는 현재 소속 공무원이 31명에 불과하고, 내년 편성된 예산안은 88억91000만 원 수준이며, 출범 3달째 공식 홈페이지도 개설되지 않았다. 이에 국교위가 맡은 업무의 규모와 중요성 등에 비해 지원과 조직이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다른 정부 위원회인 방송통신위원회는 정원 281명에 내년 예산안은 492억 원에 이르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원 250명이며 내년 예산안은 406억 원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 추진의 주역이었던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이 위원장을 맡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 역시 지난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으로서 2009년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 고시한 전력이 있는 만큼 이번 교육과정 개정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리란 우려가 이어져 온 바 있다.  

뚜렷한 보수화 경향

지난달 9일 교육부는 개정안을 행정예고했다. 앞서 정책연구진은 공청회와 국민참여소통채널을 통해 국민 의견을 수렴한 뒤 교육부에 수정·보완된 시안을 제출한 바 있다. 교육부는 해당 시안을 바탕으로 교육과정개정협의체·교육과정심의회와 논의한 끝에 행정예고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행정예고안 중 역사 과목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민주주의’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추가됐다. 가령 중학교 역사 과목 내 ‘사회 전반의 민주적 변화와 과제’라는 학습 목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정착 과정과 과제’로 바뀌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주로 보수 진영에서 사용돼 온 용어다. 그간 보수진영은 ‘민주주의’라고 쓸 경우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로 해석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진보 진영은 ‘자유민주주의’가 독재 정권 당시 반공주의 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됐던 점을 들며 교과서 표기를 반대해왔다.

이외에도 보수화·우경화된 경향은 뚜렷이 드러났다. 사회 과목에는 ‘노동자’ 대신 ‘근로자’ 표현이 사용됐고, ‘기업의 이윤 추구 외에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것의 중요성’은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및 사회적 책임을 탐색’으로 바뀌었다.

성평등·성소수자·섹슈얼리티 등 삭제

특히 ‘성’이 포함된 용어들은 대부분 보수 성향 단체들이 그간 요구해 온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수정·삭제됐다. 도덕 과목 내 ‘성평등’이라는 표현은 ‘성에 대한 편견’으로, ‘성평등의 의미’라는 표현은 ‘성차별의 윤리적 문제’로 수정됐다. 보건 과목 내 ‘성·재생산 권리’는 ‘성·생식 건강과 권리’를 거쳐 결국은 ‘성 건강 및 권리’로 바뀌었다. 

앞서 보수 진영은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제3의 성이나 성전환을 긍정하는 용어라며, ‘양성평등’ 등의 용어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해당 용어들의 사용을 반대해왔다. ‘완전한 성인’을 뜻하는 ‘전성적 존재’ 역시 앞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성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돼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끝에 삭제됐다. 

아울러 ‘성소수자’도 삭제됐다. 고등학교 통합사회의 성취기준 해설 중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사례로 ‘장애인, 이주 외국인, 성소수자 등’을 제시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 대목은 ‘성별·연령·인종·국적·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 받는 사회 구성원’으로 수정됐다. 

장홍재 교육부 학교교육지원관은 이날 “성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인 청소년기에 사회적 소수자의 구체적 예시로 성소수자가 들어갔을 때 청소년들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월 19일 교육부는 국민참여소통채널에 제안된 주요 국민 의견을 발표하면서 인권 관련 지도 시 동성애, 성전환, 낙태 등의 사례가 포함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밝혔다.

또 국교위는 심의 과정에서 보건 과목의 ‘섹슈얼리티’ 용어도 삭제했으나 삭제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섹슈얼리티’ 역시 앞서 교육부가 지난 8월 30일 국민참여소통채널 누리집을 통해 시안을 공개한 이후 공청회에서 고성과 폭력이 오가는 등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삭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쳐 온 바 있다.

이번 교육과정 보건과 시안을 만든 책임 연구원인 우옥영 경기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지난 19일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민과 함께하는 교육과정이라는 기조 속에 연구진이 교육부와 수없이 소통하며 만든 안인데, 국교위가 보건 교육과정 심의본에서도 유지됐던 ‘섹슈얼리티’를 갑자기 삭제하고도 왜 삭제했는지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정말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어 우 교수는 “섹슈얼리티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교육과정에서 이미 다룬 용어이고, 세계보건기구와 유엔 아동권리협약 등 권위 있는 국제기구와 인권조약 등을 통해 널리 통용되고 있는 말”이라며 “교육부도 이를 존중해 해당 용어를 심의본에 담았는데 국교위가 이를 삭제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관련 단체 역시 비판하고 나섰다.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하 무지개행동)은 지난달 15일 “이러한 교육부의 입장은 이미 학교 안에 존재하는 성소수자 학생의 존재를 지우는 것일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정체성이 교육 등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 조장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이며 비과학적인 관점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무지개행동은 “성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인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은 성소수자의 존재를 교육과정에서 지우는 교육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청소년이 자신의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자유롭게 탐색하며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과 학교에서, 사회에서 동료시민으로 함께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