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뉴스투데이] "혹시 운명을 믿어요?"
"운명이 뭐 별건가? 이렇게 필요할 때 내 앞에 나타나 주면 그게 운명이지…."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남녀 주인공 대화의 일부다.
운명을 믿는지 묻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여자의 답은, 일반적으로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이라 여겨지는 그것에 비해 꽤 시니컬하다. 현대 서양에서 운명이란 건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개척 가능한 영역으로도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순응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임을 대사 한마디로도 느낄 수가 있다.
운명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종교적 발상에서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러한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정해진 내 운명이라는 것도 알기는 쉽지 않다. 우연이 여러 번이면 운명이란 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연이 겹친다고 모두 운명처럼 느끼진 않는다. 결국, 운명이라 믿는 무언가는 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 서양에서의 운명을 대하는 문화적 변화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처한 상황이 다른 한 개인의 문제로 해석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개척 가능하다고 믿는 경우인 것이다.
그렇지만 운명이란 것을 대하는 자세에는 옳고 그름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철저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 선택은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관계의 형성을 위한 소중한 것이기에 그렇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든, 스스로 그것을 개척하며 어떤 힘의 지배란 것을 거부하든 개인의 선택은 존중되어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선택의 문제를 떠나서,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몹시 궁금해하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무속신앙의 힘을 빌려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 역시 잘, 잘못의 개념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이며 선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을 걱정해서, 각양각색의 이유가 운명을 더욱 궁금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내 운명을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에나 알 수 있는 그 운명이란 것을 살아가면서 그토록 꿈꾸는 건 인간이기 때문에, 감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을 믿고, 우연의 일치를 신기해하며, 운명적 무엇을 꿈꾸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