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반토막 작전, 가이아에 대한 비뚤어진 충성
온실가스 배출의 원흉, 인구 절감 아닌 해결책은?
[한국뉴스투데이] 히어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선과 악의 이원구조 안에서 ‘결국엔 선한 자가 승리’라는 공식을 확인시키며 위안을 안긴다. 선과 악은 ‘주인공=좋은 사람’이라는 연출 의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나뉘어진 구조다. 시선의 방향을 달리해 빌런(악당, Villain)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이 악당이다. 빌런과 주인공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연출자 그리고 관객이라는 절대 강자의 지지 여부 뿐이다.<편집자주>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는 힙합을 사랑하는 색다른 악당이 등장한다. 리치몬드 발렌타인(새뮤얼 L.잭슨 분)이다. 색다른 인물 설정과 스토리로 인기를 끌었던 ‘킹스맨’은 빌런의 설정도 남달랐다.
환경을 염려한 빌런
영화 속 발렌타인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이자 IT사업가다. 성공한 사업가이니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부와 부에 기인한 권력을 활용해 전세계 권력자를 움직이며 실질적인 환경보호정책이 추진되도록 하는 물밑 작업도 벌인다.
발렌타인의 목적은 병들어 버린 지구의 완전한 사망 선고를 막는 것이다. 인간 활동으로 인해 온실가스가 발생해 지구 환경이 오염되었고, 환경오염을 줄일 방법으로 인간의 수를 줄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 문제다. 탄소 배출량을 줄여 지구를 살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렌타인의 사고 안에서 지구를 아프게 하는 인간은 바이러스다.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열이 나는데 그 이유는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몸이 체온을 높여서죠. 지구도 똑같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열이고 인류는 바이러스죠. 우리가 지구를 아프게 하니까 일부를 죽여야만 희망이 있어요. 우리가 스스로 인구를 줄이지 않으면 가능한 길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숙주가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바이러스가 숙주를 죽이는 것”이라며 인구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속에서 발렌타인이 선택한 동료는 세계적인 부자 그리고 권력자들이다. 이들 일부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류를 지구에서 ‘제거’하는 것이 목표다. 인구수를 줄여 자원 고갈 문제, 인간의 생태계 파괴 문제가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권력자들을 설득할 때에도, 본인의 말도 안 되는 인류 제거 전략을 실행할 때도 오로지 ‘건강한 지구’를 머릿속에 그린다.
비뚤어진 충성
발렌타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가이아 이론’이다. 가이아 이론은 영국의 대기화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78년 저서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에서 주장한 내용으로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 즉 스스로 조절되는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지구를 의미한다.
러브록에 따르면, 가이아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대양,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로서,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즉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로 바라보면서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강조한다.
가이아의 존재 근거는 지구가 기록 이전의 역사부터 현재까지 유지해 온 생태계의 항상성이다. 지구 대기권의 화학적 작용으로 공기 조성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물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대기 환경을 조절한다. 러브록은 그것이 지구가 살아 있는 유기체임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또한 지구의 기후 역사에서 생물이 탄생한 이래 지난 35억 년 동안 지구의 기후가 생물이 살지 못할 때가 없었다는 것도 지구의 기후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것으로 보았다.
환경운동가인 발렌타인이 가이아 이론을 신봉하게 된 데는 지구 전체의 건강성을 강조하는 부분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이아 세계 안에서는 인류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 중 하나, 다양한 생물종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발렌타인이 인류와 지구를 아프게 하는 바이러스로 인식하게 된 데는 이런 가이아적 사고가 크게 기여했을 수 있다.
예정된 미래의 공포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고 이로 인한 이상기후는 인간의 삶에 큰 위협이 된다.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에 해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제5차 보고서에서 언급된 바 있다. 올해 합의한 제6차 보고서 역시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인간 활동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을 취했다.
지구의 지표면 온도는 빠르게 상승 중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 활동으로 발생한 온실가스로 현재(2011~2020년) 지구 지표면 온도가 1850~1900년보다 섭씨 1.1도 상승했다고 평가했다. 누적 탄소배출량은 산업화 이후인 1850부터 2019년까지 총 2160~2640Gt이다. 2019년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은 52.4~65.6Gt으로, 2010년보다 12% 증가했다.
해수면 상승과 얼음 유실 속도도 빨라졌다. 제5차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그린란드의 평균 빙상 유실 속도가 1992년~1999년 기간 대비 약 6배 상승했다. 해수면 상승 속도는 1901~1971년 기간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했다.
IPCC 보고서 데이터를 기초자료로 육지의 얼음량을 예측한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에 따르면, 그린란드와 남극에서 육지를 덮은 얼음층인 빙상이 16년 사이 5조880억 t이 사라졌다. 기후 시나리오에 따라 21세기 내에 얼음이 8조8,000억 t에서 35조9,000억 t까지 사라질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8조8,000억 t)는 온실가스 저감을 많이 했을 경우의 시나리오이고, 후자는 온실가스 저감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의 시나리오이다. 연구팀은 “이는 1만2000년 사이에 가장 큰 감소 속도”라고 우려했다.
필요한 것은 결자해지
과학계는 하나같이 ‘현재 속도’라면 미래의 지구 환경이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해마다 폭염, 폭우, 지진, 산불, 폭설 등으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 활동이 지구에 해가 되고 있고, 이에 기인한 이상기후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발렌타인처럼 인구 중 특정 계층을 선택적으로 생존하게 하는 비인간적, 비윤리적 방법을 택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실제로 배출하는 탄소량을 줄이는 것이다. 범지구적인 과제 ‘탄소중립’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인 상황이다.
우리나라 1인당 탄소배출량은 세계 4위(2020년 기준, 주요 산업국가 대상, Our World in Data 제공)이다. 중동의 산유국들을 제외한 순위이지만, 이들 국가는 석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많은 양의 가스를 태워야 하므로 산업국가의 지표와는 별개로 살필 필요가 있다. 2020년 우리나라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1.66t으로 호주, 미국, 캐나다에 이어 가장 많았다.
우리나라의 탄소배출량은 현재보다 앞으로가 문제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현재까지 세계 각국이 내놓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모두 이행할 경우 2030년 우리나라는 1인당 탄소배출량이 국내총생산(GDP) 상위 10개국 중 1위가 된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가 추산한 10대 주요국의 2030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한국(9.17t) 미국(8.59t), 캐나다(8.12t), 중국(7.21t), 일본(5.88t), 이탈리아(4.45t), 독일(4.43t) 순이다.
탄소 배출은 국가 경제와 맞닿아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한 산업 활동이 이어지면 탄소 배출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각 개별 산업체가 아닌 구조적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산업계의 요구다.
지난 12일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정책위의장 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산업계 R&D활력 제고 및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 기업간담회'에서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김종훈 산기협 상임이사는 기업들의 준비 현황을 설명하며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인프라 구축·협력 생태계 조성, 디지털 전환을 위한 세제지원·인력지원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중소·중견 기업계는 탄소중립 정책 조율을 위한 컨트롤타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참여형 플랫폼 생태계 구축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자균 산기협 회장은 "몇몇 기업이나 특정 정부 부처의 노력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정책적 난제인 탄소중립과 디지털 전환의 본격 추진을 위해, 초당적이고 범부처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