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진 단풍, 여름철 폭염에 단풍도 지각
‘단풍 없는 단풍 축제’, 상인들 한숨만 깊어
[한국뉴스투데이] 대한민국은 매해 여름 더위로 기록을 경신 중이다. ‘역대 최고 더위’, ‘건국이래 최고’ 등의 수식어는 더이상 낯설지 않다. 오는가 하면 끝나버리는 듯한 봄, 가을 때문에 사계절을 ‘보~여름, 가~겨울’이라는 농담이 익숙한 요즘이다.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은 머지않아 기록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가볍게 넘기기 어렵게 됐다. <편집자 주>
올 가을은 유독 덥고 짧을 예정이다. 지난 9월은 폭염, 열대야 등 가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록으로 역대 가장 더웠던 9월로 기록됐다.
무더위 9월
기상청은 기후데이터분석을 위해 매월 1일이 되면, 지난달의 기상특성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지난 8일 발표한 9월 기후특성 분석자료에 따르면, 기상관측이래 사상 첫 9월 폭염과 열대야가 나타났던 올해 9월은 월평균기온과 폭염일수, 열대야 일수가 모두 관련 통계 집계 이래 가장 많은 ‘더운 9월’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평년보다 일찍 찾아온 올 추석 연휴는 여전한 더위로 반팔 차림으로 외출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긴 팔의 ‘추석빔’을 차려 입고 외출을 하거나, 귀향길에 올랐다가는 낭패를 볼 법한 여름 날씨였다. 더위에 더해 13호 태풍 ‘버빙카’의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 잦은 비가 내려 보름달 관측도 어렵겠다는 전망도 나왔다.
추석이 있었던 지난달 평균기온은 24.7℃(평년 20.5℃)로 1973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래 역대 1위 기록이다. 뿐만아니라 전국 주요 기상관측지점 66곳 중 46곳에서 9월 일최고기온 극값 1위를 경신하기도 했다. 9월 전국 평균 폭염일수 역시 역대 1위를 기록했다. 지난달 폭염일수는 6.0일로 평년(0.2일)의 30배에 달했다. 9월까지 연간 폭염일수는 30.1일로, 평년 11.0일의 약 3배를 기록했으며 2018년(31.0일)에 이어 역대 2위를 차지했다.
가을 벚꽃의 경고
‘봄의 전령’으로 꼽히는 벚꽃은 이상 기후로 가을 단풍철에도 만나게 됐다. 일반적으로 벚꽃은 봄철에 만개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하는데, 가을에도 벚꽃이 피는 불시개화가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10년경 시작된 가을철 벚꽃의 개화는 대전 외삼동, 전라남도 함평 등 매년 전국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전남 함평군의 벚꽃을 두고 봄과 가을에 두 번 꽃이 피는 춘추 벚나무(춘추화)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날씨 변화에 따른 개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벚꽃뿐이 아니다. 대표적 봄꽃인 진달래도 가을에 개화하는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설악산국립공원 내 한계령과 화악산에서는 진달래가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철쭉 열매는 채 자라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와 같은 불시 개화의 요인은 온도, 일조량 등이다. 10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최근 한낮 최고기온이 26~27도까지 오르는 등 가을치고는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 3~4월에 피는 봄꽃이 개화하는 등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강원도 산림과학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여름이 길어지고 9월 하순까지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설악산 철쭉 열매들은 미성숙 상태에서 일찍 낙과했다. 여름이 너무 길게 이어진 데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철쭉 열매가 메말라 떨어진 것이다. 진달래의 개화 역시 온도 탓이다. 진달래는 10월 초 기온이 떨어지면 휴면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상 기온으로 가을에도 기온이 높다보니, 가을 한복판에서 봄이 왔다고 착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상 개화는 종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위험 신호다. 목본식물은 2차 생장을 통해 줄기의 둘레가 굵어지고, 나이테가 생긴데. 이들에게 가을은 휴면기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다. 여름은 길어지고 가을은 상대적으로 짧아지면서 이들 식물에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짧아진 가을로 인해 영양분을 효율적으로 저장하지 못하면,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곧 개체군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단풍은 지각, 늦은 가을
가을의 대표적 절경인 단풍은 이상기온으로 해마다 지각이다. 국내 민간기상사업자 케이웨더가 올해 첫 단풍 예상시기를 3일에서 6일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이미 전망한 바 있는데, 실제 지난 10월 4일 설악산의 첫단풍이 작년보다는 4일, 평년보다는 6일 늦게 관측됐다. 예년같아서는 9월 28일쯤에 선보여야 할 단풍이 10월 들어서야 드러난 것이다.
절기상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났지만, 아직 단풍이 출발도 하지 않은 지역도 있다. 단풍 명소인 대구의 팔공산은 단풍 구경을 아직 시작도 못했다.
늦은 단풍 역시 더운 여름이 길어진 탓이다. 9월 여름철 수준으로 높게 유지된 기온 탓이 크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설악산의 9월 평균 기온은 14.2℃로 평년보다 3℃ 이상 높았고, 특히 아침 기온이 예년보다 포근했다. 기상청의 '유명산 단풍현황'에 따르면 이날 기준 팔공산에는 아직 첫 단풍이 들지 않았다. 각 기관에서 지난달 내놓은 예상보다도 단풍이 더 늦어지고 있다. 산림청은 팔공산의 경우 오는 26일 단풍이 절정(50% 이상이 붉게 물들었을 때)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민간 기상 업체인 '웨더아이'도 팔공산에 첫 단풍이 지난 18일 시작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단풍은 일 최저기온이 5℃ 아래로 떨어져야 만들어지데 이 때문에 제 속도를 내지 못한 것이다. 늦어지는 단풍은 단순히 단풍나들이를 미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단풍이 든다는 것은 단풍나무가 생육을 멈추고 겨울준비를 시작한다는 것인데 단풍시기가 늦어지면 월동준비의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해 단풍나무의 생장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늦은 단풍, 깊어지는 시름
‘단풍 특수’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들의 일상에도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단풍이 늦어지고 있는 팔공산은 갓바위지구 상가번영회 주관으로 25일부터 3일간 '2024 팔공산 갓바위 단풍축제'가 열릴 예정인데, '단풍 없는 단풍 축제'가 될 위기여서 상인들의 걱정이 깊다.
이재원 갓바위지구 상가번영회장은 "축제는 두 달 전부터 계획해 늦출 수도 없는 상황인데, 아직 단풍이 채 20%도 들지 않았다. 늘 상강이 지나면 팔공산 전체가 붉게 물들었는데, 올핸 아직도 전체가 시퍼렇다. 축제가 코앞인데 어쩌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동화지구의 한 상인도 "원래 10월 말이 되면 팔공산 전체가 들썩였는데, 올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추세대로라면 팔공산에는 11월 초·중반이 돼야 단풍이 들 것 같다"며 "올봄에는 벚꽃 피는 시기가 늦어 말썽을 부리더니, 이젠 단풍마저 말썽을 부리고 있다. 기후 변화 때문에 꽃이나 단풍 시기를 예측할 수가 없으니 축제 일정 잡기도 점점 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